최근 정부가 탈탄소 전환과 전기화 가속을 이유로 ‘건축물 냉방설비 설치 및 설계기준’ 폐지안을 행정예고했다. 이에 따라 비전기식 냉방설비 설치의무가 폐지될 경우 하절기 전력수요 급증과 전력계통 안정성 저하가 우려되고 있다.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공학부 교수이자 대한설비공학회 가스냉방전문위원회 위원장를 맡고 있는 박찬우 교수를 만나 가스냉방 등 비전기식 냉방기 폐지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 설비공학회 가스냉방전문위원회는 어떤 조직인가
가스냉방위원회는 가스를 이용한 흡수식냉동기와 가스엔진히트펌프(GHP)분야 연구자와 기업들이 참여하며 △기술동향 공유 △제품개발 협력 △정책 대응 논의 등을 수행하는 학회 내 협의체다.
특히 △지역난방 △연료전지 △산업공정 등에서 발생하는 폐열을 냉방에 활용하는 기술을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냉방기술 개발을 넘어 에너지효율 향상과 자원순환 측면에서 의미 있는 기술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학계와 산업계를 연결해 △기술 △시장 △정책 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플랫폼으로서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 기반 에너지최적화시스템과 열에너지저장 기술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단일기술이 아닌 에너지 △생산 △소비 △순환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시스템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맡고 있는 역할과 연구분야는
에너지 물질순환시스템 연구실(EMCSL)을 운영해 친환경 및 에너지 절감형 냉동·열시스템 설계기술을 중심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열역학 △열전달 △유체유동 등을 기반으로 한 기초·응용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특히 △흡수식·흡착식 냉동기 △태양열 에너지 △산업폐열을 활용한 고효율시스템 등 연구에 주력해 왔다. 최근에는 탄소나노섬유나 탄소나노튜브 같은 신소재를 활용한 열 및 물질전달 촉진연구를 통해 기존 열유체공학과 신소재공학을 융합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 비전기식 냉방기시장 동향을 평가한다면
국내 비전기식 냉방시장은 정책의존도가 높은 구조다. 과거 의무화제도를 기반으로 시장이 형성·성장해왔기 때문에 정책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그러나 기술자체 가치가 낮아진 것은 아니다. △폐열활용 △에너지효율 향상 △전력부하 분산 등 측면에서 비전기식 냉방기술은 여전히 중요하며 글로벌시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기술에 대한 수요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같이 냉방수요가 큰 지역에서는 흡수식냉동기를 포함한 열구동 냉방기술이 여전히 경쟁력 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제도변화로 위축될 수 있으나 기술관점에서는 성장가능성이 존재한다.
■ 그동안 비전기식 냉방시스템 보급 성과를 평가한다면
비전기식 냉방시스템은 그동안 전력계통 안정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름철 최대전력 수요를 억제하고 냉방부하의 전력집중을 완화하는 기능은 핵심적인 성과다. 특히 가스냉방과 흡수식냉동기는 국내에서 설치냉방 용량기준 10% 초반 비중을 유지하며 하절기 최대전력 수요를 줄이고 냉방부하를 분산시킨다. 이를 통해 계통예비율 유지와 급전 운영안정성 확보에 기여했으며 송·배전설비 증설에 대한 부담을 완화했다.
또한 가스냉방은 여름철 가스수요를 창출해 겨울철에 집중되는 가스소비구조를 완화하고 연중 에너지소비를 보다 균형 있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에 더해 태양열이나 산업폐열을 활용한 냉방기술은 건물 에너지사용량 절감과 제로에너지 건축(ZEB) 구현에도 중요한 기반기술로 작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비전기식 냉방은 단순한 대체기술이 아니라 에너지시스템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 기술이다.
■ 정부에서 비전기식 냉방기 의무화 폐지를 예고했는데
비전기식 냉방 의무화 전면폐지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단순히 가스를 사용하는 냉방기기를 줄이는 정책으로 볼 것이 아니라 폐열과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냉방기술까지 동시에 위축될 가능성을 고려해야한다.
특히 온수형 흡수식냉동기 같이 외부 신재생열원을 활용하는 시스템까지 동일하게 축소되는 것은 정책적으로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집단에너지시스템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이 예상된다.
지역난방이나 열병합발전소에서 발생하는 폐열을 냉방에 활용하는 구조가 약화될 경우 열인프라 활용이 낮아지고 발전효율이 저하돼 에너지시스템 전반의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 이에 따라 단순한 규제완화가 아닌 에너지시스템 전체를 고려한 정책설계가 필요하다.
■ 폐지로 인해 업계에 미칠 파장을 전망한다면
국내 흡수식냉동기산업은 정책지원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의무화제도가 폐지될 경우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산업생태계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특정기업의 문제보다는 연구개발 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기술축적이 단절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내시장이 해외제품, 특히 중국이나 인도제품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고 기술경쟁력 약화와 산업주권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또한 폐열활용기술과 관련된 공급망도 약화될 수 있어 국가차원의 에너지활용 전략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전기식 냉방기 보급 확대로 미칠 영향은
전기식 냉방확대는 전력계통에 부담을 줄 수 있다. 현재 수도권을 중심으로 송·배전망은 이미 포화상태에 가까우며 변전소 증설에도 한계가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냉방수요까지 전력중심으로 집중될 경우 전력피크 증가와 계통 안정성 저하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AI와 클라우드산업 확대로 데이터센터(DC)가 급증하고 있으며 이들 시설은 막대한 전력을 상시적으로 소비하는 대표적인 전력집중형 수요처다. DC는 서버운영뿐만 아니라 냉각에도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해 여름철에는 전력수요가 급격히 증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물냉방까지 전기화될 경우 전력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단순한 수요증가를 넘어 △전력생산 △송·배전인프라 확충 △계통 운영안정성 문제등까지 동반하는 구조적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여름철 피크전력은 여전히 화력발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전기화가 반드시 탈탄소로 이어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면폐지 이전에 반드시 하절기 전력계통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특히 DC 같은 신규 전력수요까지 반영한 종합적인 수급분석이 필요하다.
또한 최대 전력관리가 필요한 건축물이나 집단에너지 연계시설에 대해서는 예외적용을 유지해 산업과 기술이 전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고려해 단계적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냉방설비정책은 단순한 기술선택이 아니라 국가 전력계통 안정성과 에너지효율, 산업생태계 전반과 직결된다. 전기화 방향성 자체보다도 전환속도와 방식이 더욱 중요하며 균형 잡힌 에너지믹스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전환해가는 것이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접근이다.